언니, 오빠들 안녕?
나는 고등학교 때 물리에 푹 빠져서 대학에서도 수학/물리를 전공으로 공부했어. 학부 때 연구조교도 하고 연구 장학금도 받고, 2학년에 전공 필수는 다 끝내서 3학년 즈음부터는 대학원 수업도 조금씩 들었어. 솔직히 공부하는 내내 내가 이 학문을 진짜 이해하지 못하고 공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 그래도 성적은 잘 나왔단 말야?
그런데 3학년 즈음에 우울증이 무지 심하게 왔고, 그래서 휴학을 반복하다가 일단 겨우 졸업은 했어. 그리고 여러해에 걸쳐 반복적으로 우울 삽화를 겪다가 결국은 2형 양극성장애(조울증) 진단을 받았어.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문제가 생겼어. 공부한 것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그냥 전문적인 내용을 조금 잊은 수준이 아니라, 중학교 수학문제도 못 풀어. 딱 사칙연산을 할 수 있는 정도야. 미적분을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커녕 그게 뭐였는지도 잘 모르겠고, 수학 기호를 보면 그냥 암호문 같아 보여.
최근에서야 이 상황을 마주 볼 용기가 생겨서 조금 찾아봤는데, systematized amnesia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어. 그런데 특정 사건에 대한 기억이나 정보가 아니라, 몇년을 공부한 도메인 지식이 삭제되는게 가능한가?
원래 기억력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고, 정신과적 문제 때문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이나 사건들이 많은 편이야.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자기 과거에 대해 얼마만큼의 정보를 기억하는지 모르겠어서 내 기억의 구멍들이 정상 범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어)
참고로 지금 나는 매우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며 살고 있어. 매일 우울하고 비참한 기분을 느끼며 살지만 겉보기엔 티가 나지 않기 때문에 가족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은 내 정신과적 문제를 알지 못해. 의사는 내 감정상태에 따라 약물 처방을 잘 해주는 것 외에는 딱히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어.
혹시,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조언을 줄 수 있을까? 언니 오빠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내가 이 문제를 극복할 - 기억을 되살릴 - 방법이 있을까? (다시 중학교 수학부터 공부하는 것도 도움이 될까 싶은데, 솔직히 무섭기도 하다.)